믿음
믿음 (Glaube / Fides)
1. 개요: 개념과 현상학 (Begriff und Phänomenologie)
신학적 맥락에서 믿음(Glaube)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불확실한 추측이 아니다. 믿음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Verbum Dei)과 인간의 실존이 만나는 접점이다. 조직신학적으로 믿음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 Fides quae creditur (믿어지는 믿음): 믿음의 객관적 내용, 즉 교리(Doctrina)와 신조.
- Fides qua creditur (믿는 믿음): 믿음의 주관적 행위, 즉 신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위탁하는 실존적 결단.
TRE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는 믿음을 종교적 실존의 중심 현상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말씀에 의해 촉발되는 '수동적 능동성'임을 강조한다.
2. 성서적 기초 (Biblische Grundlagen)
2.1. 구약: 견고함과 신뢰 ('mn)
구약성서에서 믿음을 나타내는 핵심 어근은 히브리어 'mn이다. 특히 히필(Hiphil)형인 헤에민(he'emin)은 "어떤 대상을 견고하고 확실한 것으로 여기다" 혹은 "거기에 기대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he'emin)..." 여기서 믿음은 감정적 동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삶의 가장 확실한 기반으로 삼는 '실존적 정위(Fixierung)'를 의미한다. 이사야 7:9는 이를 언어유희로 표현한다: "너희가 믿지(ta'aminu) 아니하면 정녕 굳게 서지(te'amenu) 못하리라."
2.2. 신약: 피스미스 (Pistis)와 그리스도 중심성
신약의 헬라어 피스미스(Pistis)는 구약의 신뢰 개념을 계승하되, 그 대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체화한다.
- 바울 서신: 바울에게 믿음은 '율법의 행위(ergon)'와 대립하는 개념이다(롬 3:28). 믿음은 인간의 성취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빈 손'이다.
- 공관복음서: 예수의 기적 사화에서 믿음은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침투할 수 있는 개방성으로 묘사된다.
3. 교의학적 발전 (Dogmengeschichtliche Entfaltung)
3.1. 아우구스티누스와 중세: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
아우구스티누스는 믿음을 지적 동의(assensus)로 보았으나, 이것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보았다. 악마도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고 떨기 때문이다(약 2:19). 따라서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이어야 한다. 이 관점은 스콜라 신학으로 이어져, 믿음(fides)이 사랑(caritas)이라는 형상(forma)을 입어야 비로소 공로가 되는 덕(virtus)이 된다고 가르쳤다.
3.2. 종교개혁: 오직 믿음 (Sola Fide)
마르틴 루터는 중세의 '형성된 믿음' 개념을 타파하고, '벌거벗은 믿음'(nuda fides)의 가치를 역설했다. 루터에게 믿음은 사랑의 행위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로 그리스도와 연합(unio cum Christo)하는 것이다.
- 신뢰(Fiducia): 루터는 믿음의 본질을 단순한 역사적 지식(notitia)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promissio)을 나를 위한 것으로 붙잡는 전적인 신뢰(fiducia)로 재정의했다. 여기서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반지(Ring, der Christus fasst)"가 된다.
3.3. 근대: 감정과 주관성
계몽주의와 슐라이어마허(F.D.E. Schleiermacher)에 이르러 믿음은 교리적 승인보다는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는 인간 의식의 상태로 해석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현대 신학에서 칼 바르트(K. Barth)에 의해 다시금 "인간의 가능성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으로 강력하게 비판받고 재정립되었다.
4. 조직신학적 종합 (Systematische Entfaltung)
정통 개신교 신학(Orthodoxy)은 참된 믿음의 3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 구조는 오늘날에도 믿음의 건전성을 진단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 지식 (Notitia):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다. 믿음의 대상(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지적인 앎이 전제되어야 한다.
- 동의 (Assensus): 그 지식이 참되다는 것을 이성적, 의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 신뢰 (Fiducia): 지식과 동의를 넘어, 그 진리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기는 행위이다. 구원하는 믿음(fides salvifica)의 핵심은 바로 이 신뢰에 있다.
결론: 믿음의 현재성
오늘날 신학에서 믿음은 과거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소망을 넘어,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계속적인 창조의 수용'으로 이해된다.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ing)의 지적처럼,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인간이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실존 양식"이다.
📚 참고문헌 (Bibliography)
- Primary Source: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TRE), Bd. 13. Berlin/New York: De Gruyter, 1984, S. 275–365. (Artikel: "Glaube").
- Ebeling, Gerhard. Dogmatik des christlichen Glaubens. Tübingen: Mohr Siebeck, 1979.
- Pannenberg, Wolfhart. Systematische Theologie. Bd. 3.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93.
- Luther, Martin. De libertate christiana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 (WA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