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
계시 (Offenbarung)
1. 개요 (Definition & Thesis)
신학적으로 계시(Offenbarung)는 감추어져 있던 신적 신비가 인간의 역사와 지성 속으로 드러나는 사건을 의미한다. 라틴어 revelatio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지니나, 현대 조직신학, 특히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논의 이후 계시는 단순한 초자연적 정보(Information)의 주입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계시(Offenbarung als Geschichte)로 이해된다.
본 항목의 핵심 논지(Golden Thread)는 계시가 '말씀(Wort)'이라는 수직적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보편사(Universalgeschichte)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 역사의 끝에서만 온전히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 안에서 미리 앞당겨져(proleptisch) 나타났다.
2. 성서적 기초 (Biblical Foundations)
2.1. 구약: 갈라 (Galah)
구약성서에서 계시를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갈라(גָּלָה)'는 본래 '귀를 열다' 혹은 '눈을 뜨게 하다'라는 신체적, 감각적 은유를 내포한다.
- 이현 (Epiphanie): 초기 전승에서 야훼는 시내산 현현과 같이 특정 장소와 사건 속에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신다.
- 역사적 행위: 출애굽과 같은 구원 사건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계시적 사건이다. 예언자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야훼의 해석(Deutung)을 전달하는 매개자였다.
2.2. 신약: 아포칼립시스 (Apokalypsis)
신약의 헬라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종말론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 이는 마지막 때에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 중심성: 바울 서신에서 계시는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된다(갈 1:12). 하나님의 '의(Dikaiosune)'는 율법 외에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 요한의 로고스: 요한복음 1장은 계시자가 곧 계시의 내용임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화된 말씀(Logos incarnandus)으로서,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되 아들이 아버지를 나타내셨다(요 1:18).
3. 교의학적 발전 (Dogmatic Development)
3.1. 명제적 계시 vs. 인격적 계시
- 전통적 견해 (Vatican I & 구개신교 정통주의): 계시는 초자연적 진리들의 집합(명제적 계시)으로 이해되었다. 성경은 오류 없는 신적 정보의 보고로 간주되었다.
- 실존적/인격적 전환: 19세기 이후, 계시는 정보가 아니라 인격적 만남으로 재해석되었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와 칼 바르트(Karl Barth)는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주시는 사건(Ereignis)"이라고 주장하며, 성경은 계시 자체가 아니라 계시의 증언이라고 보았다.
3.2. 바르트의 '말씀의 신학' (Wort Gottes)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Kirchliche Dogmatik)』에서 계시를 '위로부터 수직적으로 떨어지는(Senkrecht von oben)' 사건으로 묘사했다. 그에게 역사는 계시가 일어나는 무대일 뿐, 계시 자체를 구성하지 못한다. 계시는 인간의 종교나 역사의 연속성을 끊고 들어오는 심판이자 은총이다.
4. 현대적 논쟁: 역사로서의 계시 (Pannenberg)
본 항목의 중심 논의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와 그의 학파(Heidelberg Circle)가 1961년 출판한 『계시로서의 역사 (Offenbarung als Geschichte)』를 기점으로 전환된다. 이들은 바르트의 말씀 중심주의(Kerygma theology)가 역사적 사실성을 약화시켰다고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시했다.
4.1. 간접적 계시 (Indirekte Offenbarung)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경의 특정 구절이나 개인적인 신비 체험 속에서 직접적으로(theophanic)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그분이 행하신 역사적 행위들(Taten Gottes)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을 알리신다.
4.2. 보편사 (Universalgeschichte)
계시는 특수 구원사(Heilsgeschichte)의 게토에 머물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든 민족의 운명과 연결된 보편사로 확장된다.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하므로, 계시 역시 누구나 눈 있는 자는 볼 수 있는 역사적 공공성을 지녀야 한다.
4.3. 종말론적 선취 (Prolepsis)
역사의 의미는 역사가 끝나는 시점(Eschaton)에서만 확정된다. 따라서 역사가 진행 중인 현재에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의 종말이 시간 한가운데서 미리 일어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 결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끝을 미리 보여주는(proleptic)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확정적으로 계시하는 결정적 지점이다.
5. 결론 및 신학적 함의 (Synthesis)
오늘날 계시 논쟁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는 권위적 선언과 "역사가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이성적 검증 사이의 긴장에 놓여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article/칼케돈 공의회)의 『계시헌장 (Dei Verbum)』은 "행위와 말씀(Gestis Verbisque)"의 내적 결합을 강조함으로써 이 긴장을 종합하려 시도했다.
결국 기독교 신학에서 계시는 닫힌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 인격과 역사 안에서 종말론적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하나님의 자기 증여이다. 신앙은 이 계시된 미래에 자신의 현재를 맡기는 행위이다.
📚 참고 문헌 (Bibliography)
- Primary Source: Pannenberg, Wolfhart, ed. Offenbarung als Geschichte.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1. (MCP Injection)
- Barth, Karl. Kirchliche Dogmatik I/1. Zürich: EVZ, 1932.
- Rahner, Karl. "Hörer des Wortes". Schriften zur Theologie.
- Trethowan, Illtyd. Revelation and the Modern World.
-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TRE), Bd. 25. s.v. "Offenbarung".